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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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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건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24.02.06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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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중에 꽃핀 ‘피난교회’의 사랑과 봉사
서울위생병원 제주분원의 치료와 친절에 제주 주민들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자리돔은 이름에 ‘돔’이 들어가지만, 참돔이나 돌돔처럼 고급 어종은 아니다. 제주 바다에서 흔히 잡히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생선이다. 비싼 녀석들이 육지로 팔려갈 때도 자리돔은 제주도민의 밥상에 흔히 올랐다. 어려운 시절에 주린 배를 채워주던 자리돔은 이제 물회나 젓갈로 만들어 도민은 물론 관광객도 즐겨 찾는 별미가 됐다.


“제주도에 왔으면 이곳 토속음식을 한 번 먹어봐야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한공숙 장로(성산교회)는 기자의 손을 이끌고 바닷가 근처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멀리까지 취재 온 기자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성산포 피난생활과 피난교회에 관한 것이기에 어쩌면 한 장로는 자리돔이란 물고기를 통해 그 시절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꺼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제주도에 미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한 장로가 물었다. 대충 아무 숫자나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좁은 제주도에 미신만 1만8000가지가 넘는답니다. 그러니 그 시절에 교회에 다닌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어요?”


제주에 그렇게 많은 미신이 있었다고? 말문이 막혔다. 미신은 본래 어렵고 불안한 환경에서 싹을 틔우기 마련. 기댈 곳이 없으니 미신에 기대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제주도민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증거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 만든 미신이 반대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성산포 피난생활 시절 복음을 받아들인 재림성도들의 삶이 딱 그랬다. 예컨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상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자, 상놈 중의 상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실제로 가족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핍박에 교회에 다니다 떠나간 사람이 몇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제주분원의 정성스러운 치료와 직원들의 친절에 지역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용 함정인 LST(Landing Ship Tank)를 타고 피난 온 의료진은 제주에 발을 디딘 지 일주일 만인 1월 26일, 성산서국민학교(현 동남초등학교)의 한 교실을 터 진료를 시작했다. 직접 오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서는 가방을 챙겨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왕진을 경험한 이들 상당수가 교회에 나왔다. 한 장로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계기 역시 어느 성도의 친절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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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한옥선 씨라고 위생병원 직원이 자녀들을 데리고 피난 와 있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저를 처음에 보자마자 ‘공숙이는 나랑 성씨도 같으니 내 아들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서울 사람이 제주도 시골 소년에게 그렇게 말하니 내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 장로는 갑자기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는 베드로전서 1장 19절 말씀을 외웠다. 처음 교회에 출석한 1951년 2월 셋째 안식일의 장년교과 기억절이었다. 그 자리에서 암송하는 한 장로를 향해 “우리 교회에 든든한 일꾼이 왔다”며 환영하는 성도들의 말대로 그는 성산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했다. 


아흔을 맞은 올해도 그는 교회 선교회장을 맡아 헌신하고 있다. 1934년생인 한 장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제주 4·3사건을 모두 경험했다. 워낙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전쟁이 발발하고 한 장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51년 3월 11일부터 삼육중학교 피난학교가 성산포 해변가 바위 밑에서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성산포 해변과 집을 오가며 한 장로는 피난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피난교회는 아직까지도 한 장로의 가슴 속에 믿음의 주춧돌로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다. 


전란 중에도 의료와 교육으로 선교의 깃발을 꽂았던 재림교회는 1951년 2월 11일부터 3월 3일까지 약 3주 동안 수양회를 겸한 대전도회를 개최했다. 성산포 통조림공장에서 열린 이 집회는 역사상 제주에서 열린 최초의 공중집회였다. 전국에 내린 비상계엄령과 뿌리 깊은 미신사상으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5~6명의 구도자를 얻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교회건축의 뜻을 품었다. 이후 4월에는 고성리 2741-7번지(현재 동류암로 33번지)에 예배당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5월에는 돌을 이고 지고 나르며 건물을 쌓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12월 9일, 42평의 돌로 쌓은 성전을 주께 드리는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가졌다. 그것이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는 피난교회다.


자리돔물회를 먹으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 기자는 내친김에 자리돔젓도 맛을 보기로 했다. 오랜 기간 곰삭은 젓갈의 맛은 똑 쏘면서도 시원했다. 묘한 맛에 약간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 기자의 모습을 보고 한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삭으면 발효가 돼서 젓갈이 되는데, 타의로 삭으면 그냥 부패해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 말을 들은 기자의 뇌리에 성산포 피난교회가 스쳐 지났다. 지금 피난교회는 발효되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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